빈 요소수통의 쓸모
텃밭에 고추 모종을 옮겨 심었다.
아침 햇살은 봄을 부추겼지만,
밤바람은 여전히 겨울을 놓지 않았다.
'뭐, 설마 죽겠어?'
애써 무심한 척했지만,
고추 모종은 바람에 휘청이며 속삭였다.
"나, 아직 준비 안 됐거든?"
마음 한켠이 찔렸다
.
주위를 둘러보다가
텃밭 구석에 버려진 빈 요소수 통을 발견했다.
누구에게는 그냥 쓰레기.
그러나 내게는,
"긴급 구조 요청"이었다.
칼을 꺼내 조심스럽게 잘라냈다.
입구를 넓히고, 손잡이는 남겼다.
마치 고깔처럼.
고추 모종 위에
살며시 덮어씌웠다.
누군가는 묻겠지.
"그거 덮는다고 따뜻해지냐고?"
대답은 간단하다.
"모르는 소리 하지 마."
보온은 물리적인 것만이 아니다.
심리전이다.
고추 모종도
"나를 이렇게까지 챙겨주는구나"
하는 마음에
더 단단히 뿌리를 내릴 것이다.
밤바람이 불어도
요소수 통 고깔 안에서
고추 모종은 조용히, 그러나 강하게 살아남을 것이다.
버려진 플라스틱 안에 갇힌 게 아니다.
살아 있으려는 숨결을 지키기 위해
버려진 것조차 다시 살아난 것이다.
빈 통이 쓸모없다고?
아니다.
문제는 쓸모가 아니라,
'쓸모를 볼 줄 아는 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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